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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죽음 이후, 지수와.

1.

  눈을 떴을 때, 나는 처음보는 세계에 있었다. 내 기억 속 마지막은 뚜렷했다. 언령의 뜻대로 죽음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딘가의 언덕에 있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의 풍경은 내가 살던 세계와 달랐다. 영문도 모르는 채 마을로 내려가 두리번 거리며  살펴보니 짐작대로 이곳에 살고 있는 생명체 역시 드래곤이 아니었다. 나와 계약했던 그 꼬맹이와 닮은걸 보면, 인간이 사는 ‘운명’의 세계인가보다. 나는 분명 죽었을텐데, 왜 이곳에 있는거지? 이곳이 우리의 사후세계인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잠시 생각을 밀어두고 낯선 문명과 생명체들이 가득한 이 세계를 둘러보았다. 검은 돌이 평평하게 깔린 길에는 이상한 탈 것을 타고 다니는 인간들이 가득했다. 온통 각지게 만든 집들이 빼곡한게 인간들의 취향이란 드래곤과는 확실히 다르단 말이 탄식처럼 터져나오기도 했다. 도통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옆으로 탈 것을 탄 인간이 지나간다거나, 쇳덩이 같은게 추락한다거나 하는 구경을 잔뜩했다. 인간들이 하나같이 놀란 얼굴을 했었지만 별로 신경쓰진 않았다. 그렇게 인간의 세계를 구경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전부 죽어서 ‘죽음’의 세계에 왔다고 했나.”


  내가 ‘운명’의 세계에 온게 운명이라면 내가 해야할 일이 있는게 아닌가? 있다면 짚이는건 한 가지 뿐이다. 그게 언제, 어디일지 알 수 없었으나 발길이 이끄는 곳으로 걸었다. 나는 ‘언령’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들. 내가 가야할 곳이 있다면, 내가 가고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신께서 인도해줄 것이다. 그래, 마지막에 분명 그 꼬맹이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건 그들이 성공했다는걸 의미하기도 했다. 닿지도 않았을 마지막 말을 다시, 새로이 덧씌우리라.


  역시 내가 없으면 될 것도 안 풀리지, 쬐꼼아.


2. 

  이야~ 사고쳤다. 어쩐지 쬐꼼이가 심각하고 진지하게 만들던 모형을 부수고 말았다. 며칠 밤을 새어가며 만든 모형은 이 세계의 건물과 닮았다는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쪼만한 손을 꼼지락대서 이런게 만들어지고.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재주가 많은가보다. 쬐꼼이가 오려면 시간이 얼마 남았더라. 딱히 미안하진 않았다. 중요한걸 그렇게 눈에 띄고 밟기 좋은 곳에 둔 사람 잘못이지, 잠결에 밟은 내가 미안해야할건 뭔데? 되려 조금 신나기 시작했다. 어쩐지 놀려먹는게 재미있는 녀석이라 오늘은 또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기대됐다. 이 정도면 진짜 화내는거 아냐~ 


  라고 그냥 안일하게 생각했다.


  “....................”


  지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나를 부르지도, 한숨을 쉬지도 않고 가만히 부서진 모형을 내려다보다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오….. 화를 내지 않은건 의외인데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재미있진 않아 실망하며 밖으로 나갔다. 

  

  피곤해보이는 얼굴을 보니 밤새 모형을 다시 만든 모양이다. 대학이라는 곳에 다닌다고 했지. 거기에 내야한다고 했던가? 그걸 내야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나? 호기심이 꼬리를 물고 늘어갔지만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식사를 끝내더니 학교로 가버렸다. 뭐야, 무시하는거야? 설마 그거 좀 밟았다고? 그거 때문에?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럴수도 있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랬는데, 이렇게 오래 갈거라곤 생각치 못했다. 뭐야, 뭐야.. 이 쬐꼼이 진짜 열받으면 아예 상대를 안해주는거야? 이건 재미없다. 놀리는건 반응이 있어야 재미있는거지, 이렇게 반응이 없으면 무슨 재미란 말인가. 언제까지 무시하나보자, 싶어서 끈질기게 따라다녀봐도 완전히 없는 드래곤 취급이다. 결국 길게 한숨을 쉬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야, 많이 화났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제서야 무표정한 얼굴이 나를 향했다. 가만히 보기만하다 이어지는 말에는 조금 소름끼치기까지 했다.

  “하나도 안미안하죠? 칼이 잘못한건 아무것도 없죠?”


  아….. 정곡을 찔린 표정을 감출 수가 없어 머쓱하게 웃었다. 하하, 응~ 안 미안해~ 어쩌냐 내가 자다 깨서 밟을 수도 있고~ 밟힐 자리에 중요한걸 두면 안되는거지~ 아무리 내가 동거하는 존재감이 없어도 여기서 잠은 잔단 말이지~ 말을 나오는대로 아무렇게나 해버리자, 지수는 더욱 표정을 굳혔다.


  “그래요. 제가 칼을 무시할 수도 있고, 무시하게 눈에 띄면 안되죠?”

  진짜 화났구나. 조금 아득해져서 죽고 살아난 뒤로 가장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 뭔가 묘하게 맞는 말인데…….. 진짜 할 말이 없네……..


3.

  꼬맹이는 오늘도 바쁜 모양이다. 이른 아침부터 주섬주섬 가방에 짐을 잔뜩 챙겨나가며, 오늘도 같은 말을 한다. 

  “칼, 제가 없는 사이에 제발 사고치지 말아요.”

  “걱정되면 계속 지켜보시던가~”

  같은 대답을 듣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한숨쉬며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평범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