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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사망로그

  모든게 처음이던 시절이 있었다.


  ‘당연하다’는걸 알기 전, 모두가 나를 두려워하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항상 행운이 뒤따랐다. 무엇을 해도 잘 되었고 원하는건 갖게 되었으며 갈증이라는걸 느낄 틈이 없었다. 나를 돌봐주던 노인은 그것이 나에게 반드시 이롭지는 않다고 말했다. 뭐든 잘 풀리는게 어떻게 이롭지 않을 수 있지? 노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갈증’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아.


  알 수 없는 목소리와 안개에 취한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눈 앞이 흐린 것도 같았다. 날붙이로 손목을 깊게 베어 끊없이 새빨간 피가 흘러나오는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건 아주 영리한 장치야. 어떤 신이 만든걸까? 운명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거두어갈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 그건 내 스스로 나를 해하는 일이었다. 내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그그 전에도 ‘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모두 스스로 숨을 끊었다 전해졌다. 노인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의 끝조차 신의 사랑을 받는 자에게 정해진 운명인 것마냥 스스로를 해한 것이다. 


  “모두 어이없어하겠군.. .”


  그 누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굴기로 악명높은 ‘칼’이 스스로 숨을 끊으라 예상했겠는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 없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지. 웃음이 나와 허탈하게 웃었다. 계약자의 선한 눈망울이 슬픔으로 젖어드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 착해빠진 얼굴을 화로 채우는 재미를 즐겼는데 이제와서 걱정같은게 피어오르는게 우스웠다. 이 짧은 시간에 정이라도 든 것인지, 역시 누군가가 나로인해 눈물을 흘리는건 불쾌한 것인지. 어쨌든 이런 질척한 감정으로 이루어진 눈물은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걸 돌아가서 설명하기도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도 없잖아. 이 자리는 아무리 보아도 나의 운명인 것을.


  “이것 봐, 영감탱. 그때나 지금이나 난 스스로 선택하는거야…”


  깊게 그은 손목에서 흐르는 피는 바닥에 가득 고여갔다. 조금씩 어지러워 느릿하게 바닥에 앉았다. 비참하기에 스스로 숨을 끊는 자들은 어떤 심정일까. 이렇게 천천히, 서서히 죽어가는 것에 만족할 비참함이란 무얼까. 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런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갈증이라는게 무엇인지 알게된 이후로 다시는 그것에 빠지지 않기 위해 흘러왔기 때문이다. 노인은 내게 소중한 것이, 갖고 싶은 것이, 살아갈 이유가 생기길 바랐다. 운명에 의해 살아지는 삶을 살지 말라 하였다. 너는 운명에 단단히 묶여 무엇하나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살아있는 것들은 ‘욕망’으로 운명이 아닌, 자신의 의지대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런건 당신 생각이고… 숭고한게 뭔지 알게 뭐야.”


  • 칼. 너는 네가 가장 소중하지 않느냐. 너를 상하게 하는건 무엇이라도 꺼려지지 않느냐. 통증이 무엇인지, 상실이 무엇인지 알 수도, 알 일도 없지 않느냐. 그래서야 마음이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아무리 12언령을 타고 났어도… .

  • 그게 뭐? 아니꼬와? 영감탱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봐놓고 마음이 있니 없니 하는 소리가 나와? 웃기네. 

  • 네게 마음이 있다는걸 어떻게 믿지?

  • 잘 봐.


  잘 봐. 풋내나는 손으로 날붙이를 쥐고 제 얼굴에 날을 박아 천천히 그어낸다. 콧등부터 얼굴의 반은 그어진 선부터 선명한 붉은 색으로 젖어들었다. 노인은 뒷걸음질쳤다. 날카로운 통증에 날붙이를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댔다. 그래. 이게 갈증이다. 나는 나를 길러준 늙은 드래곤에게만큼은 마음을 부정당하는 것이 싫었다. 영감탱이는 모르지. 내 좁은 세계는 영감탱 하나 밖에 없었고 그걸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는걸.


  • 이걸로 영감탱이랑도, 이 마을과도 끝이야. 다시는 안 올거야. 방금 영감탱을 도려냈거든. 

  • 칼, 갈때 가더라도 상처는…,

  • 됐어. 이게 영감탱이 말하던거 아냐? ‘운명에 묶여서’ 끌려가는거. 기억하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란 운명을. 그건 영감탱도 마찬가지였던거야. 신중한 지배자가 되길 바랐던거겠지만, 다른 드래곤으로 구해봐~


  이제 그 노인의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게 얽힌 모든 것을 끊어냈고 흘러가는 삶을 살았다. 이제와 맺은 하나의 관계는 어차피 끝이 정해진 관계였다. 죽음으로 깨끗하게 부서질 수 있는 ‘계약’으로 엮인 관계이니 되려 나았다. 


  하지만 네 얼굴과 목소리는 기억나네. 꼬맹아. 어느새 몸을 겨눌 힘조차 없어 바닥에 닿은 몸과 시선은 붉은 글자가 저절로 번져나가는게 눈에 들어왔다. 계약은 끝나겠지만 들어주기로 한건 나니까, 끝까지 하고싶긴 했는데.., 이걸로 됐겠지. 시야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갔다.


  집에 가라, 꼬맹아. 네 갈증을 채우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