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스급 송태원X성현제
회귀, 그리고 세 번째 세상이 이어져간다.
오늘도 언제나와 같이 송태원의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가지런하고 반드시 쓰는 것만 정리되어있는 사무실은 그 답다고 느껴졌다. 사무실에 수도 없이 드나들었지만 세 번째 세상엔 익숙함이 없었다. 그의 사무실은 자신이 남긴 흔적들이 가득했었다. 두고간 만년필. 선물한 책. 서랍 안에 넣어둔 쪽지. 그의 사무실을 내 집인 양 어지럽혔고 송태원은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그 뿐, 제지하지 않았다. 남겨둔 흔적들을 버리지도 않았다. 잘 정리된 검소한 방에 하나 둘 남겨진 내 물건들은 눈에 띄었었다.
이제 그런게 하나도 없지.
나는 분명 송태원을 대신해 죽었다. 던전에 들어온후, ‘폐륜아’가 몰래 귀뜸해주었다. 만약, 만약에. 내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목숨을 내놓으라고. 처음엔 심드렁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리 없었고 목숨을 내놓는다니,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나?
-죽으면 소멸하게 되겠죠. 하지만 초승달은 그걸 두고보지 않을거에요. 저희의 힘을 나누어 당신을 초월자로 부활시킬 겁니다.
그들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지만 송태원이 죽을 판이였다. 그를 죽게 내버려둔다면 틈을 봐 던전 보스를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싶지 않았다.
송태원이 죽는걸 두 번 보고싶지 않았다.
얼음쐐기에 꿰뚫리고, 눈 앞이 점점 흐려져갔다. 충격으로 물든 송태원의 얼굴을 기대했었는데, 어딘가 먹먹해 그 얼굴을 보고싶지 않았다.
- .. 그런 얼굴은 말게나. 마음 약해진다네.
그것을 끝으로 의식이 끊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5년 전. 그리운 시절로 돌아와있었다.
나 이외에 모든 것이 그 시절의 것들이고, 이 세상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 자리는 모두 다른 이들로 채워져있었고 내가 이루어낸 것들 역시 다른 이들이 이루어낸 것으로 되어있었다. 나는 이 시간대에 완벽히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를 보지 못했고, 나 역시 누구에게도 닿을 수 없었다.
‘폐륜아’들의 실수였는지, 의도대로 되지 않은건지 이도 저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가 있던 곳,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 둘 보러갔다. 세성 길드 사람들, 한유현과 한유진, 리에트와 노아, 문현아.
누구도 나를 보지 못했다. 나의 빈 자리를 느끼지도 못했다. 모든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원래부터 없던 존재가 되어있었다. 예상 밖의 상황이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하나 둘 존재를 부정당하자, 정작 가장 확인해보고 싶었던 상대에겐 갈 수 없었다.
송태원.
그 역시 나를 보지도, 빈자리를 느끼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다른 이가 채워져있다면 견디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잘 지내는지 보고 싶어서 결국 그의 사무실에 가버렸던 것이다. 정갈히 정리된 사무실 앞에 서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용건이 있으시면 들어오십시오.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 뒷걸음질쳤다. 그 누구도 내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방금, 송태원은 내 인기척을 느낀 것 마냥 말을 걸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나 이외엔 없었다. 누군가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에 애써 힘을 주어 끌어내렸다.
아직 확실한건 아니잖아. 그래도 어쩌면. 어쩌면.. , 송태원은 내 존재를 인식할 지 모른단 생각에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목을 쥐고 몇 걸음 더 물러났다. 결국 한숨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가 정말 나를 인식할 수 있다면. 송태원만이 나를 인식할 수 있다면 그가 나를 부정하지 않도록 설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건 몇 가지 없었다. 어찌 설명해줄까.
넌 항상 나에게서 타인을 지키려 했지.
등에서 한 쌍의 날개가 돋아나 펼쳐졌다. 이 세상의 존재도, 다른 세상의 존재도 아니게 된 뒤로 가진 애매한 이점은 이런 잔재주였다.
이번엔 괴물이 아니라 너를 지키는 천사인걸로 하자.
그렇게 결정하고 던전에서 마주했었지. 나를 인지하는걸 확인한 뒤로 송태원의 주변을 맴돌며 수호천사처럼 굴고있었다. 천사노릇도 꽤 재미있어. 아, 올 시간이 되었는데 언제 온 담. 그의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와, 태원아.”
네가 나를 보는 순간에만, 내 존재가 피어났다.